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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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말,말,말!

인생은 게임이 아니야

M.미카엘라 2009. 2. 6. 14:42

 

 

지난 월요일 어둠이 걷히지 않은 아침.

연희동성당에서 소미아빠 대부님의 장례미사를 마친 직후 7시쯤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혹시 주무시는 건 아닌지… 저, 소미소은이 보고 싶은데 오늘 보러가도 되나요? 너무 갑작스러운 번개라, ㅋㅋ>

그런데 내겐 낯선 번호였다.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ㅋㅋ 저 정○○ 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입니다>

 

용인에 살 때 군인성당에서 만난 신학생이다. 학사님(신학생을 가톨릭신자들은 이렇게 부른다)은 우리가 용인을 떠나오기 직전 전역을 해서 신학교에 복학을 했는데, 주일학교 아이들하고 유난히 잘 놀아주고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분이라 아이들도 꽤 보고 싶어했다. 방학 때 한번 우리 집에 온다고 했는데 그날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학사님은 군인일 때와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군인밥(이거 ‘짬밥’이라고 해야 한다 사실. ㅋㅋ)으로 찐 살이 확 빠져서 183센티미터 키가 더 후리후리해 보였다. 솜손은 헤어스타일 완전 달라진 채 군복 아닌 사복을 입고 나타난 학사님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 한켠에 낯설음과 쑥스러움을 숨기지 못했지만 서로 안부를 묻고 뭐 그러면서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떡만둣국을 끓이기 전부터 애들하고 놀아주기 시작한 학사님은 정말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하고 정말 잘 논다. 워낙 성당에서도 아이들하고 학사님, 군종병들은 게임을 많이 하며 지내서 아주 셋 다 게임이라면 고수인데, 그날은 우리 집 벽장 속에 있던 보드게임이 총출동했다. 셋 다 한 승부욕씩 하는 터라 이것저것 옮겨가며 아주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열중하는데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내가 한 마디 거들었다.

“얘들아, 근데 너희 왜 인생게임은 안 해? 학사님하고 인생게임 해. 그거 좋아하잖아.”

 

‘인생게임’은 웬만한 초등학생들은 잘 아는 보드게임으로 어른처럼 어떤 한 가지 직업으로 한 번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임이다. 부동산도 사고 주식도 사고 세금도 내고 보험도 들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러면서 사는데, 재산을 많이 모으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점이 좀 흠이긴 하지만 게임의 한계다.

 

그런데 소미 대답이 단호했다.

“안돼요. 학사님은 그런 인생 살면 안돼.”

“왜에? 게임이잖아. 학사님은 신부님 되실 거니까 게임에서나마 다른 인생도 한번 살아보시게 해드려. 재밌잖아.”

“그럼... 그럴까? 학사님 괜찮아요?”

“그래. 어떤 건데?”

그때 소은이가 무심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한 말이 우리를 놀래켰다.

“맞아. 여긴 성적인 인생이 없어….”

“성적(性的)인 인생?”

학사님과 나는 동시에 똑같이 물으며 폭소했다. 속으로 둘 다 ‘허걱~ 화류계 인생?’ 뭐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는 모른다. 순간 멈칫했을 때 곧 그건 우리 어른들의 대단히 큰 오해였다는 게 밝혀졌다.

“네에. 성(聖)스러운 인생 말이예요. 성적(聖的)인 인생.”

“아하~ 성스러운 인새~앵? 난 또 뭐라구…”

 

학사님이 성직자나 수도자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 게임 속에 있는 직업엔 그런 ‘성적(聖的)인 직업’이 없단 이야기다. 아, 같은 글자가 한자(漢子)에서 완전하게 다른 의미로 갈린다. 학사님과 나는 킬킬댔고 곧 게임은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 급한 볼 일로 아파트 앞에 잠시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아래 계단을 오를 때부터 게임에 열을 낸 솜손의 목소리가 그때까지 쩌렁거렸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학사님한테 물었다.

 

“학사님, 저 없는 동안 뭐 좀 재미난 인생을 사셨어요?”

“아우~ 저 완전 난리 났어요. 애들 넷을 주르륵 낳고…”

“히히 엄마, 그래서 학사님 애들 교육비 내느라고 완전히 인생 거덜나셨어요.”

“뭐 거덜?”

“학사님 인생 쫑 나셨어.”

“뭐 쫑? 아구 손손, 이 말 본새하곤, 내가 정말….”

“히힛...”

아, 우리 소은이가 때때로 말이 쪼매 거칠다.

 

“학사님은 그냥 학사님 하셔야 되겠다. 다른 인생은 안 되겠다. 학사님, 그냥 신부님 하세요. 그게 이 게임의 교훈이네요.”

내가 이런 농담을 하며 그날의 게임은 정리했다. 애들하고 재밌는 영화나 한편 보려고 했다는 학사님의 계획대로 가까운 극장에 가서 판타지 영화 <잉크하트-어둠의 부활>을 보고 헤어졌다.

 

 

 

 

대건 안드레아 학사님은 올해 4학년이 되어 마침내 수단을 입는다고 했다.

“이제 반 왔어요.”

수단은 하얀색 로만칼라가 돋보이는 단추 쫘르륵 많이 달린 검고 긴 원피스를 말한다. 영화 <신부수업>에서 권상우가 많이 입었던. 4학년이 되면서 그 옷을 입는 것은 이제쯤 세속의 욕망과 욕심, 번뇌 들을 끊어줄 때라는 의미 아닐까. 사제(司祭)가 되기까지 길고 고단한 여정 가운데 이제 하프 지점에 도달한 학사님께 앞으로도 내내 기도와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가정방문을 하며 호스피스 실습 과정 중이었는데, 갑자기 지도수녀님 사정으로 생긴 소중한 하루 시간을 솜손과 함께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학사님, 아들 딸 낳고 허리 휘게(^_^) 돈 벌어서 먹이고 입히고 하는 건 우리들이 할 테니, 세상 사람들이 힘겨운 가운데 기운 잃지 않도록 부디 좋은 신부님이 돼주세요. 사제서품 때는 솜손과 함께 꼭 갈게요.’ ***

 

 

 

 

*** 학사님(왼쪽)은 클라리넷 연주로 군생활을 군악대에서 했다. 

클라리넷 배운 주일학교 아이들과 협연하며 작은음악회를 했던 2007년 가을 오후.

 

 

P.S 학사님 죄송해요. 허락 안 받고 그냥 올립니당. 너무 정겹죠?

누가 이 동영상 보고 알아보며 싸인 부탁하거든, 걍 해주셔요. 

근데 화질이 너무 안 좋아서 잘 못 알아볼 거예요.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