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뼘 성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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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울타리

언니를 부탁해!

M.미카엘라 2015. 3. 25. 03:25

 

얼마 전 내가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소은이는 어린 시절 우리가 키운 소은이와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아? 애가 청소년기 맞으면서 마음이 너무 여려지고 약해진 것 같애. 자신감도 떨어지면서 좀 소심해진 것도 같고. 겉으로 보기엔 야무지고 똘똘한 거 같은데 애가 확실히 좀 약해진 것 같아. 생각보다 친구들 한마디에 영향도 많이 받고 신경 쓰고 휩쓸리는 것도 같고.”

 

그런데 그제, 그런 나의 생각을 산산이 깨주는 일이 있었다. 시작은 소미의 근황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소미는 고3이 되자마자 초중고 학교생활 11년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친구 문제로 힘들어했다. 먼저 1학년 때까지 아주 친했던 친구 A가 그 누구도 이유를 모른 채 소미를 미워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였다. 이유나 알고 싶다고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데 친구들이 다 말렸다고 한다. A와 아주 친하다는 친구들도 왜 소미를 미워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소미 니가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해도 그 애는 받아주지도 반응도 안할 것이라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처 덜 받는 일이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나는 둘이 친했던 거 알면서 런 말 중간에서 전하는 친구가 더 밉다고 했더니 그건 오해라고 했다. 2학년 때 A와 친했던 친구 B가 소미에게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소미야, 나는 A가 너만 보이면 잡아먹을 듯 욕을 하고 미워해서 너에 대해 선입견이 있었는데, 같은 반 되고 널 보니 너 괜찮은 애 같애. 근데 혹시 복도에서 내가 A와 이야기라도 하고 있다가 널 볼 때 내 반응이 좀 싸늘해도 좀 이해해줘. 미리 말하는데 니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야.”

A에 대한 작은 의리 때문이라는 말로 들린다.

 

소미는 나는 A가 밉지 않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나는 하느님께 맹세코 A의 험담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지금도 A를 좋아한다, 라며 펑펑 울었다. 1,2학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절친이 단 한 명도 같은 반이 되지 못한 외로운 처지에서, A와 친했던 친구들이 대거 소미네 반이 된 것도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애들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대체로 다른 친구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미친 친화력을 자랑한 소미가 학교 가는 일이 스트레스여서 아침에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펑펑 울었다. 밥도 거의 잘 안 먹고 우울해하더니 얼굴 살이 많이 빠졌다.

 

남편과 나는 친구들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소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아무런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친구와 다 잘 지내고 싶은 소미의 친구 욕심에 반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줄 순 없다는 현실에 뼈아프게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제까지 살면서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듣거나 배척 받는 느낌을 경험하지 못한 소미에게는 나름 큰 시련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미를 잘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었어도 그렇게까지? 라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소미의 의외의 약한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센 척, 거친 척, 거침없는 척, 호탕한 척, 상처 안 받는 척 하는데 소미는 실제 그렇지 않았다. 아주 약했고 별 거 아닌 일에 흔들렸고 남의 이목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온실 속의 화초구만.”

 

최근 언니의 알 수 없는 우울모드의 실체를 모두 알게 된 소은이의 첫 일갈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강펀치!

1도 아니고 고3인데 뭔 친구에 그렇게 신경을 쓰나? 차라리 혼자 열공할 분위기라 잘 됐구만.”

 

그리고 이어지는 소은이의 화려한 친구학개론에 남편과 나, 소미는 입을 헤~ 벌리고 감탄을 연발했다. 언니의 두부멘탈’ ‘유리멘탈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굉장히 논리적이고 날카롭다. 어린데도 사람 심리, 관계의 역학에 대한 그 나름의 통찰이 엿보였다. 다채로운 자기 경험을 깨알같이 소개하며 나도 남편도 말해주지 못한 부분까지 샅샅이 커버했다. 그럼에도 유머와 재치가 가득한 입담으로 제 언니를 들었다 놓았다, 쥐었다 폈다 하니 소미는 맞아 맞아!” “그래서?”, “어쩜.... 너 대단하다!” “너 완전 족집게다이런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느새 기분이 한결 나아져있었다.

 

 

그렇게 철벽 치는(자기들끼리만 친한) 애들한테는 절대 먼저 친하고 싶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 돼. 없어 보여. 자기들이 뭐 대단한 줄 착각한다니까. 그냥 무시하고 덤덤히 지내. 그러면 걔들이 어느 날 먼저 다가오고……나는 또 어느새 그들과 섞여있게 되지. ㅎㅎ 근데 그런 애들은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험담하고 자멸하는 경우가 많아. 그니까 안 다가와도 걍 냅 두면 시간이 해결해줘.”

 

난 친한 친구와 무슨 일로 다투거나 오해가 생겨 냉전이 오래 가고 풀릴 기미가 없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 이야기 좀 하자 하고 한적한 장소로 불러내. 그러고 솔직하게 할 말을 다 해. 그리고 그 애 이야기도 들어. 내 앞에서 울었던 애들이 더러 있어. 근데 이상하게 그러고 나면 그 이후론 한 번도 안 싸우고 잘 지내는 거야. 근데 A언니는 언니랑 대화할 생각이 아예 없다 하니 그냥 내버려둬. 수능 보구 나서 대화를 시도하던가. 지금은 별로 안 좋아. 근데 그때도 상대를 안하겠다 하면 진짜 빠이빠이지 뭐.

 

언니, 피구부 예은이 알지? 좀 자기 맘대로이고 놀았던 애. 걔가 하도 나를 화나게 하길래 내가 화장실로 불러내서 이야기를 다 했어. 근데 나중에 예은이 제일 친한 친구가 나한테 와서 예은이가 나 만나고 와서 많이 울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니가 좀 달래주고 풀어주면 안 되겠느냐 하더라. 그래서 그렇게 했어. 그 이후로 예은이랑 잘 지냈어.”

 

근데 난 내가 잘못했다 싶으면 자존심 싹 다 버리고 바로 사과해. 내가 별로 잘못했다 생각 안하고 있는데 여러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번엔 니가 좀 심했다, 잘못했다 하면 그것도 지체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야. 고집 부려봐야 별 거 있어? 대단한 일로 싸운 것도 아닌데.”

 

언닌 완전 온실 속 화초구만. 맨날 그렇게 친한 친구들하고 떨어질 새 없이 같은 반 되었던 게 언니를 나약하게 만든 주범이야. 난 정말 거의 매번 친한 친구들과 다 찢어진 채 새학년으로 올라가서 지금 언니처럼 단 한명도 친한 친구가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냐. 다 서먹하고 모르는 애들 뿐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새 친구를 자력으로 조달해야 했는데, 난 아무리 궁해도 철벽 치는 애들이나 친하기 어려운 애들하고 굳이 친하려고 노력 안 해. 뭐하러? 당분간 다른 반에 가서 놀다오면 되지 뭐.”

 

나는 심하지는 않았지만 반 전체가 나를 따돌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로운 기분이 들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어. 내가 좋아하는 다른 거 하고 시간을 보내다보면 친구는 또 생겨.”

 

난 관계가 안 좋아진 친구가 내 앞에 있어도 절대 다른 애들 앞에서 티내지 않아. 내가 불편한 내색하면 그건 지는 거야. 정말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지. 베프 정윤이하고 딱 한번 냉전중일 때도 나는 정윤이네 반에 가서 그것도 정윤이 앞자리 친구와 호탕하게 웃고 놀다 돌아왔지. 그 친구가 나중에 정윤이가 너하고 다시 잘 지내고 싶어한다는 정보를 줘서 내가 먼저 말 걸었지만. ㅎㅎ

 

잘 지내다가도 변덕부리는 애들이 있어. 편 가르고 험담하고. 여자애들 고질병이야. 거기서 난 좀 거리를 두려고 늘 노력해.”

 

나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약한 사람이야. 자기들이 함부로 친구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까부는 애들을 보면 확 기를 꺾어서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 일루와, 이런 대접 처음이지? 하면서 말야. 근데 난 선배들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약자인 후배들에게 이상하게 약해. 후배들한텐 무슨 말을 못하겠어.”

 

울어도 보고 울려도 봐야 내공도 생기지.”

 

엄마, 내가 행복지수가 좀 높아요. 그건 내 기분을 잘 조절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세상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내가 기분 좋아야지 사는 게 즐겁지. 왜 남 때문에 내 기분을 망쳐?”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이밖에도 소은이는 무수한 명언을 쏟아냈으나 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쉽다. 정말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소은이가 저렇게 많은 일을 내색하나 없이 징징대지 않고 자력으로 해결하며 커왔다니 정말 대견했다. 어린 시절 우리가 키운 소은이가 맞았다. 반듯하고 때로 고집 있고 강단 있는 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도 눈치 못 챌 정도로 훅 큰다.

 

손손! 너 정말 내가 키운 딸이 맞냐? 오늘부터 너를 관계의 달인으로 명명하노라. 너 정말 멋지다야~ 엄만 이 나이가 되도록 잘 못하는 일을 우리 소은이는 어쩜 그렇게 잘하냐아? 언니한텐 아빠 엄마보다 네가 백배 낫다. 올 한해 언니를 좀 부탁해! 언니의 두부멘탈을 강철멘탈로 단련시켜줘. 넌 할 수 있어. 정말 우리 소은이 끝내주게 멋있다.”

ㅎㅎ 어렵지 않지 머...”

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못하고 사는데 어린 나이에 저렇게 명쾌하게 감정을 정리하고 관계를 조율하며 살다니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하고 기특했다.

 

소미도 머리로는 모르는 게 아니다. 자기가 지금 이런 거에 눈물 찔찔 짜는 게 한심하다는 것도 알고,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안다. 누가 뭐라 해서 힘든 것보다 자기 혼자 끙끙 북치고 장구치고 신경쓰며 더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중학교 때부터 내내 으쌰으쌰 하는 좋은 반 분위기에서만 살다보니 적응 안 되어서 힘들고,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아니 고3이라는 민감한 시기라 학년 말이나 되어야 해결될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머리로는 다 알면서도 이에 맞춰 유연하게 마음을 바꾸는 게 잘 안 되니 괴롭다. 하지만 야자하고 늦게 돌아와서도 에너지 넘치게 가려운데 긁어주고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며 시원스레 이리저리 잽과 어퍼컷을 골고루 날려주는 소은이의 솔루션에 화를 내기는커녕 깔깔대며 공감하고 동조하면서 마음이 많이 풀린 듯했다. 소은이 너가 부럽다고 하면서 앞으로 너의 조언을 기꺼이 듣겠으니 자주 나를 채찍질 해다오 한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어제, 소미는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오늘 점심 잘 먹었어요. 요즘 점심 급식 거의 못 먹었는데 오늘은 들어가더라. ㅎㅎ 배 고파요. 아침에 먹은 새우죽 또 있어요? 한 그릇 주세요. 반찬도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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